'B-29' 난데없이 이리 폭격 "삐라인 줄 알았다, 죽음이 쏟아졌다"

'B-29' 난데없이 이리 폭격 "삐라인 줄 알았다, 죽음이 쏟아졌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이리역 폭격…철도원, 민간인 등 수백명 사상
1기 진화위에선 '오인 폭격' 판단, 정식 희생자는 91명
미군 과실 인정과 사과 없이 하세월…억울함 안고 사라지는 유족들
2008년 이후 추모제마저 끊겨…반짝 관심갖던 정치인들, 행정도 무관심
작전상 폭격 가능성·희생자 수 등 여전히 규명될 것 많아…3기 진화위 기대

익산역에 설치된 이리폭격희생자위령비. 독자 제공익산역에 설치된 이리폭격희생자위령비. 독자 제공"비행기 2대가 이리 상공을 여러차례 맴돌았다 했드니 삐라 비슷한 물체가 비행기에서 쏟아졌다 했더니 갑자기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여기 저기에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폭격이라 하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수백명이 죽어간 뒤였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에 의한 '이리역 폭격 사건'이 발생한 지 75년이 지난 가운데,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지자체와 시민사회의 관심도 옅어져 사건이 잊힐 위기에 처해 있다.
 

대낮 폭격에 91명 희생돼…1기 진화위 권고는 대다수 미이행

'이리역 폭격 사건'이란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 30분쯤 미 극동공군 소속 B-29 중폭격기 2대가 전라북도 이리시 철인동 이리역과 평화동 변전소, 목천동 만경강 철교 등에 폭탄을 투하하고 사격해 이리역 철도 근무자와 인근 거주민 등 91명 이상을 사망케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난 2010년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활동을 통해 진실이 규명됐다.
 
당시 진화위는 진상 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미국과의 협상 △국가 사과와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부상 피해자 의료 지원 △제적부·가족관계등록부 등 공식기록 정정 △역사 기록의 수정 및 등재 △외교적 노력 및 인권의식 강화 등의 내용을 권고사항으로 제시했다.
 
CBS노컷뉴스 취재결과 위의 권고사항 중 대다수는 아직까지도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행정안전부 과거사업무관련지원단(과거사업무지원단)에 따르면 이리역 폭격 사건에 관련해 진화위의 권고사항이 이뤄진 건 제적부 및 가족관계등록부 등 공식기록 정정 등 일부뿐이다.
 
미국과의 협상과 국가 차원의 사과 등 진실 규명과 억울함 해소를 위한 권고사항은 이행되지 않았다.
 
희생자 위령제 등 추모사업 지원도 없었다. 시민단체 중심으로 희생자를 추모하고 위로하는 위령제가 몇 차례 열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2008년 이후부터는 전무했다.
 
익산시는 줄곧 "사건 대상자들이 사망하거나 타 지역으로 흩어져 연락할 방법이 없기에 위령제 등 행사를 진행하지 못했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진화위 권고가 내려진 2010년 당시엔 故이창근 씨를 중심으로 유족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시민사회의 관심도 두터웠을 때였다.
 
전북특별자치도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진화위 권고사항 대부분이 국방과 외교 등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였다"며 "익산시도 국가의 방향에 발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다"고 답했다.1950년 9월 B-26 경폭격기의 전북 이리조차장 폭격 장면. 김태우 교수 저서 <폭격> 중1950년 9월 B-26 경폭격기의 전북 이리조차장 폭격 장면. 김태우 교수 저서 <폭격> 중

사과받지 못한 채 잊혀지는 사건..유족 보상과 억울함 달랠 방도 없나

 진화위의 진실 규명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유족들은 국가의 사과를 받지 못했고, 국가의 외면 속에 시민사회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갔다.
 
1950년 7월 11일 당시 폭격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故이창근 씨를 중심으로 구성된 유족회가 진상규명 운동과 법안 발의 시도 등을 활발히 이어갔지만, 실제 법안 발의 등으로 실현되진 못했다.
 
당시 진상규명 운동에 참여했던 이세우 목사(들녘교회 담임)는 "당시 정부를 향해 여러 시민단체가 모여 연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피해자 정치권과 협력해 피해자 보상법을 발의하려는 시도 등 전국으로 이슈화 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고 싶어하는 보수 정권이 들어서자 진상 규명 운동의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며 "나이드신 유족 분들이 돌아가시고 활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하나둘씩 떠나니까 아예 동력을 잃었다"고 회고했다.
 
유족회 회장을 맡는 등 일생을 진상 규명과 미군을 비롯한 국가의 사과를 위해 노력한 故이창근 씨도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투병 중에 세상을 떴다. 그 후로 시민들은 이리역 폭격 사건을 잊었다.
 
박영일 진실·화해위원회 전문위원은 "국가가 (피해자에게)사과하고 미국과도 얘기를 해야하는데 현안이 아니었기에 언급이 안됐다"며 "그 과정에서 피해 회복은 요원했고 유족들은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채 한 두분씩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또한 "진실 규명이 되어 보상을 위한 소송을 제기해도 판사와 시기에 따라 같은 피해자가 다른 결과를 얻는 등 결과가 달랐다"며 "외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에게 포괄적으로 배·보상을 하는 법을 제정해 시행하면 조금이라도 억울함을 해소할 수 있다"고 밝혔다.1950년 7월 11일 미군의 이리역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故이창근씨의 증언 중 일부. 익산시의회 한국전쟁당시 익산역 폭격사건 청원심사결과보고서 중 발췌1950년 7월 11일 미군의 이리역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故이창근씨의 증언 중 일부. 익산시의회 한국전쟁당시 익산역 폭격사건 청원심사결과보고서 중 발췌 

 작전상 폭격·희생자 수 등 여전히 규명될 진실 많아…3기 진화위에서 밝혀지나

이리역 폭격 사건은 규명돼야 할 진실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당시 미군이 '오인 폭격'을 한 것이 아닌 '작전상 폭격'을 했다는 내용이다. 故이창근 씨는 일평생을 미군의 폭격이 오인이 아닌 의도적인 폭격이었다고 주장했다.
 
'오인 폭격'이란 결론을 내린 진화위도, 당시 폭격이 미군의 작전에 따른 폭격이었을 가능성도 보고서에 명시했다.
 
진화위는 "이리역을 폭격한 폭격기가 소속된 제19폭격전대가 귀대 이후 작성하는 임무보고서(Mission Report)가 현재까지 확보되지 않아 B-29가 이리지역에 폭격을 했는지, 실제로 어떤 작전을 수행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는 해당 임무보고서를 확인하면 1950년 7월 11일 당시 폭격이 '작전상 폭격'이 맞는지, 진화위의 발표대로 '오인 폭격'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확한 희생자 수를 파악하는 것도 과제로 남아있다. 진화위는 폭격으로 인한 정식 피해자는 91명이라 밝혔지만, 폭격 이후 남겨진 유족들은 총 300명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박영일 전문위원은 "이리역 폭격 사건은 여전히 규명해야 하는 진실이 남아있는 사건"이라며 "곧 출범하는 3기 진화위에서 작전상 폭격과 정확한 희생자 수 등 더 많은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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