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 독서도 '죄'였지만…총 대신 책 들고 일어선 항일 10대들 ② 시외버스에 항일벽보…'어린이'들의 기발했던 독립운동 ③ 10대의 마지막 봄, '독립 만세' 외치다 팔과 눈을 잃었지만… ④ 손가락 신경 뽑히고 매질…'악질 왜놈 만행' 치를 떤 학생들 ⑤ 대한독립 함께 외쳤지만…항일과 친일로 엇갈린 운명 (계속) |
'일본인 검사가 엄하게 심문을 했는데 학생들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대답을 했는데 "너희들이 어찌 우리들이 어찌 너희의 판결에 복종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우리 강토를 빼앗고 우리 부모를 학살한 강도들인데 반대로 삼천리의 주인인 우리에게 불법이라고 하니 옳지 못한 판결이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중> 같은 기전여학교 출신으로, 1919년 전북 전주에서 일어난 3.13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까지 한 김인애와 임영신은 교내 비밀결사대 '공주회'의 일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기도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임영신은 일제와 독재에 부역해 승승장구하고, 끝까지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소신을 지킨 김인애는 광복 전까지 일본의 감시 대상이 돼 어려운 삶을 사는 등 두 사람의 삶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CBS노컷뉴스는 엇갈린 두 사람의 삶을 조명하며 광복 80주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알아본다.
'자주·평등' 근대 교육받은 기전 학생들…민족의식 불태워
1920년대 콜튼 교장 당시의 고등과 졸업반. 기전여고 제공190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전북 전주에 세워진 기전여학교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자주 교육과 민주주의 교육 등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근대 교육 시설이었다.
근대 교육을 일찍이 접한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자유·평등과 같은 근대의 시대정신과 국가 의식, 민족의식을 배양했다.
여기에 한국 최대의 곡창 지대로, 토지 침탈, 쌀과 면화 등 생산물 이출로 반일 감정이 깊어진 호남의 지역적 배경은 기전여학교 학생의 항일 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책 베껴 쓰고, 일왕 사진에 구멍 뚫고…학교 안에서 투쟁한 학생들
1915년 4월, 기전여학교엔 우수한 성적으로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박현숙이 수학 교사로 부임한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박현숙 선생은 임영신, 오순애, 송귀내 등 믿음직한 학생 몇을 선발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명칭을 '공주회'로 정한다.
박 선생은 공주회의 학생들에게 민족과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그의 영향을 받은 공주회 회원들은 새벽마다 함께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거나, 일본의 감시를 피해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는 등 민족의식을 기르는 데 노력했다.
공주회는 학교 당국에 조선의 역사를 가르쳐달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일원 중 한 명인 김인애의 오빠인 서문밖교회의 김인전 목사로부터 <동국역사>를 몰래 들여온다.
학생들은 각자 머리카락을 뽑아 땅에 묻고 "우리 비밀을 지키자"라고 맹세한 후, 밤새 책을 베낀다. 이들은 열심히 베낀 역사책을 다른 학생들과 돌려 읽으며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얼마 안 가 적발된다. 당시 기전여학교의 교장이었던 콜튼 선생은 "나라를 위해 뭘 하든 간섭하고 싶진 않지만, 난 학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여러분의 행동이 학교를 위험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말하며 그만 둘 것을 요구했다.
역사를 배우는 것 못지않게 기전여학교를 지키는 것도 중요했던 학생들은 교장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학생들은 정성스레 베낀 동국역사와 책자를, 눈물을 머금고 서문밖교회 마당 구석에 파묻는다.
제58회 3.1절 기념식에 함께 모인 기전여학교 졸업생들. 공주회 멤버였던 김공순, 김신희 여사도 함께했다. 기전여고 80년사그렇다고 포기할 공주회가 아니었다. 동국역사를 베껴 쓰는 작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공주회의 일원인 오자현은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의 자그만 힘이라도 모아 왜놈들을 골탕 먹이고 괴롭히자. 조금도 겁내지 말고 조국을 위해서 무슨 일이건 하자"
당시는 기전여학교에 배치된 일본인 교사 2명이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가르치고, 행사 때마다 일본 국가를 부르고 일왕이 있는 쪽으로 절하게끔 시키는 등 조선총독부의 간섭이 심해질 때였다.
학생들은 조회 시간과 행사 때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고, 동방 요배도 거부하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강당에 모여 진행된 행사에서 일본인 선생 하세가와의 구령에 따라 일본 국가가 시작됐다. 그러나 소식을 듣지 못한 몇 학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일본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이어진 동방 요배에서도 학생들은 선 채로 버텼다.
이후에도 기전여학교에선 이와 같은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일본인 교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학교에 경찰까지 부른다. 그러나 주동자를 찾진 못했고, 학교는 오히려 조회 시간이나 행사 때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 학생들의 승리였다.
1단계 투쟁에서 승리한 학생들은 곧바로 2단계 투쟁에 돌입한다.
기독교 신앙을 믿는 학교에서 일왕 사진이 교실마다 걸려있는 게 못마땅했던 임영신, 김인애, 강정순 김연실, 오자현 등은 어느 날 밤 기숙사를 슬며시 빠져나와 교실마다 다니며 정면에 걸려있던 일왕 사진의 두 눈을 뚫어버린다.
다음날 학교 당국은 전교생을 모아 놓고 추궁했지만, 학생들은 저마다 "내가 했다"라며 자신을 벌해 달라 말한다.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한 학교는 기전여학교의 모든 교실에서 일왕의 사진을 치운다. 일본에 맞선 학생들의 투쟁이 또다시 성공한 것이다.
3.1 만세운동 직후 수감됐던 기전학생들 출옥기념사진. 앞줄 좌측에서 두 번째가 임영신이다. 기전여자고등학교 80년사배추 바구니에 숨긴 태극기…3.13 만세 운동 주도하고 검거된 기전 학교 학생들
학생들의 투철한 항일의식은 전국적으로 확산한 3.1만세운동에서 빛을 발한다.
1919년 2월 27일, 임영신은 3.1운동을 지휘하고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김인전 목사 등에게 전달하고, 전주 장날인 3월 13일을 거사일로 한 만세 운동을 계획한다.
13일 당일 전주 시내에 만세 시위가 일어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과 경찰은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모여드는 장꾼들의 행동을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태극기를 채소 가마니에 숨겨 남문 장터까지 무사히 운반한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높여 불렀다.
일경은 시위대에게 공포탄을 쏘고 30여 명의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검거된다. 그러나 임영신과 김인애 등 13명의 주동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석방된다.
1919년 3월 15일 자 매일신보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지에서는 십삼일 오후 일시경에 각 학교 생도 급 일반시민 중 수백 명이 각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거쳐 재판소 앞까지 쇄도하여 시위운동을 행하였는데, 이날은 마침 면 장날인고로 뇌화하는 자 수천 명에 달하여 일시 혼잡을 극한 바, 경관이 민활한 활동으로 즉시 이를 해산하고 약 이십여 명을 검거하였는데, 이 중에 기전여학교 생도 십삼 명이 체포되었으며 일반 시민은 철저 경계 중이라더라'
1919년 3월 15일 매일신보. 3.13만세운동 후 검거된 기전여학교 학생들을 기록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나라를 위해 만세 외친 것이 잘못인가?" 잡혀가서도 당당했던 기전 학생들
검거된 13명의 학생은 형무소에 구속됐다. 검거된 지 10일 만에 13명 모두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돼 취조를 받고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 6월 10일 보석이 허가돼 석방된다.
감옥에 갇힌 공주회 회원들은 초지일관 당당한 태도로 일본의 심문에 맞섰다. 1919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소요 사건에 관한 민정보고서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19년 4월 18일 총독부 시학관 다나까는 전주 감옥을 찾아 수용 중인 임영신을 주모자로 하는 기전 여학교 만세 사건 관련자들을 심문실에 호출했다. 다나까는 그들에게 "그릇된 불온사상을 가지고 소요를 일으킨 결과 이런 고생을 하게 되니 후회되지 않느냐? 속히 가정에 돌아가도록 해 줄 터이니 모든 것을 털어놓아라"하고 회유했으나 그중 주모자 임영신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을 기도했으니 몸은 비록 어떻게 되든 독립운동을 결코 중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건 만세 사건에 관련된 주모자들은 '도저히 회유할 수 없는 용납지 못할 악질분자'들이다" 3개월의 옥살이 끝에 보석이 허가된 학생들은 6월 2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법정에서 재판 받는다.
최후 진술 기회가 주어지자, 임영신은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또한 우리 조국의 앞날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그런데도 우리를 갖가지 고문과 옥살이로써 죄인 대접을 하는 것은 만고의 죄가 된다는 것을 당신네들은 알아야 한다. 내 나라 내 강산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으로 당신들 일본은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재판장은 어린 여학생들이라는 점을 들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다. 이에 불복한 하시모토 검사 측이 항소했으나, 기각된다.
일본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맞섰던 어린 기전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될 정도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3.13 만세운동을 주도해 6개월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김인애(최기물) 판결문 중 일부. 국가기록원 일제 몰래 역사책 필사하며 독립 운동…항일과 친일로 엇갈린 운명
1941년 10월 22일 경성 부민관에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가 열렸다. 1941년 10월 23일자 <매일신보>기전여학교 학생으로서 당당히 일제에 맞선 공주회 회원들. 이들의 항일 의식은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굳건했지만, 이들 중 일부는 학생 때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일본은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외친 임영신은 일본과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난 후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활동해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적극 옹호하고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나선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이름 그대로 전쟁에 임하기 위한 단체였다. 단체의 강령은 물질 근무 공출의 철저화, 국민 생활의 최저생활화, 전시 봉공의 의용화였다. 일제는 국민을 최저수준으로 생계유지만 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쟁 물자로 공출했다. 교회당의 쇠 종, 집의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전쟁 물자가 됐다.
임영신은 1942년 2월 1일,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가정생활에도 결전 체제를 바란다>는 강연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조선인의 참여를 독려했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도 친일파가 생길 만큼 1938년 이후엔 모든 지식인, 사회 집단 명망가들이 전부 친일로 돌아선다"며 친일로 변모한 임영신의 행동을 "일본에 의한 세계 지배를 내면적 신념으로 받아들인 자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평가했다.
임영신은 광복 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이인자로 승승장구한다. 상공부장관으로 발탁되고 첫 여성 국회의원이 되는 등 성공한 삶을 산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난 후엔 <나는 왜 군사정권을 지지하는가>란 성명을 내며 5·16쿠데타를 옹호하기도 했다.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 마친 대한민국 정부. 앞 줄 좌측에서 두 번째가 임영신. 대한민국 역사박물관반면, 김인애는 학생 때의 소신을 이어간다.
3.1만세운동 이후, 일본의 요시찰 대상이 된 김인애와 그 오빠 김인전 목사 가족은 말 그대로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결국 김인전 목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망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으로 활동하다 1920년대에 객사한다. 김인애 지사의 가족은 김 목사의 동생 김가전 목사가 이끌었는데, 요시찰 대상이 된 김인애 가족은 입에 풀칠할 정도의 삶만 이어간다. 김인애 지사의 손자 김상수(78)씨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려운 삶이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온 가족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인애는 학생 때 일본에 저항했던 소신을 끝까지 지키며 산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진학과 취업, 행정의 어려움이 있는 시절이었음에도 끝까지 거부한다.
김인애는 일본어 사용도 끝까지 거부했다. 김인애 의 아들 故 김진화씨는 생전에 남긴 기록에서 "일본어를 못하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일제가 여성들을 정신대로 끌고 갈 때, 첫째 딸 김옥정도 정신대에 보내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유창한 일본어로 호통치는 모습을 보며 일부러 안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김인애는 가난한 이들을 돕고, 고아들을 모아 기르는 등 평생 이웃을 위해 살다 생을 마감한다. 김상수 씨는 "명절 때마다 우리 집 앞에 바가지를 들고 선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김치며 반찬, 곡물 등을 다 나눠주시고는 '올해는 다 끝났다'라고 하시던 할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다"고 말했다.
"당시에 독립운동 안 한 조선인이 어디 있느냐"라며 독립운동 사실을 밝히길 거부하고, 후손들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김인애는 2009년이 되어서야 독립 유공자로 인정을 받고, 대통령 훈장도 받는다.
2009년 3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이 김인애 지사의 손자 김상수(78)씨에게 대통령 훈장을 전달하고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함께 외친 독립, 엇갈리 삶이 가리키는 오늘날의 과제
이처럼 정반대의 삶을 이어간 임영신과 김인애의 행적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에게 가리키는 바가 크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임영신의 친일 행위는 명백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엔 등재되지 않았다"며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여러 타협을 거쳐 친일파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임영신은 광복이 되지 않았다면 친일 행위를 적극적으로 이어 나갔을 것이다"며 "임영신은 승승장구했지만, 같은 기전여학교 학생 중엔 김인애처럼 끝까지 소신을 지키며 조용히 살다간 인물도 있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국민의 역사 인식이 성장하고 과거와 다른 민주 정부가 더 진보한 사회적 합의를 마련한다면 임영신과 김인애 같은 인물들이 재평가되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일파의 후손들이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의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려운 일이다"라며 "인물이 아닌 단체를 기준으로 친일파를 규정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