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재벌, 전주 최고의 극장을 꿈꾸다…코리아 vs 삼남

버스재벌, 전주 최고의 극장을 꿈꾸다…코리아 vs 삼남

전주국제영화제 20주년 기획 <안녕, 극장>②
블루오션 찾던 버스재벌의 도전 '코리아극장'
'니가 하면 나도 한다' 열흘 뒤 나타난 '삼남극장'
최첨단 기기 도입하며 피튀기는 경쟁…승자는 누구?

전주국제영화제가 성년이 됐습니다. 지난 1999년 디지털 영화와 독립영화를 위해 우렁찬 울음을 터뜨린 게 벌써 20년 전입니다. 이제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와 표현의 해방구'를 자처하며 영화 발전의 한 축을 맡고 있습니다. 전북CBS는 오는 5월 2일 영화제의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아 전주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전주의 영화인 故 탁광 선생의 삶의 궤적을 다시 그려봤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비빔밥도, 한옥마을도 아니다…전주는 '영화'다
② 전주 최고의 극장을 꿈꾸다…코리아 vs 삼남
(계속)

Scene #2 자존심 강한 두 버스회사의 대결, '코리아극장' vs '삼남극장'

광복 직후 국내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념에 몸을 던진 이들이 총칼을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파편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물밑에서 사업을 일으켜 큰돈을 만지는 이들이 있었는데, 김현철씨가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형 김현성씨 소유의 운수회사인 대한여객의 전무이자 실질적 운영자였다. 대한여객은 군용 트럭(일명 GMC)을 개조한 버스 몇 대로 전라북도 곳곳을 누비는 회사였다. 날이 갈수록 후발주자들이 늘어 경쟁이 거세지자 김씨는 운수업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신사업'으로 떠오르던 극장 경영에 뛰어들 틈을 엿보기 위해서였다.

나란히 선 학생들 뒤로 보이는 코리아극장의 모습. 1965년. (사진=전주역사박물관, 전주시청 제공)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신규 극장 설치허가가 너그러워진 그때가 바로 그 기회였다. 김씨는 1962년 3월 17일 허가를 받아 현 전주 고사동 전주시네마타운 부지에 2층 1182석 규모의 최신식 영화관을 세울 그림을 그렸다.

이 소식을 듣고 별안간 영화판에 뛰어든 '불청객'이 있었다. 김씨의 운수업계 선배이자 삼남여객 대표 이응우씨였다. 삼남여객은 말 그대로 전북-전남-충남까지 노선을 뻗친 큰 회사였다.

삼남은 신문사에 건설회사까지 갖춘 재벌이었다. 극장 신설쯤은 그리 대단한 모험도 아니라는 듯 이씨는 코리아극장 허가 소식을 들은 지 9일 만인 1962년 3월 26일 현 전주조이앤시네마 부지에 삼남극장 신설 허가를 따냈다. 코리아극장에서 고작 200m 떨어진 곳이었다. 고사동 '영화의 거리'는 이렇게 출발했다.

1967년 삼남극장의 모습. (사진=전라북도청 제공. 위 사진을 전라북도청의 허락 없이 무단 전재, 복제, 배포 등을 통해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라이벌의 등장에 코리아극장은 승부수를 던졌다. 호남 최초로 70㎜ 영사기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대다수 극장이 쓰던 35㎜ 영사기보다 10배는 비싼 '물건'이었다. 35㎜ 영사기로 보는 영화가 그냥 영화라면, 70㎜ 영사기가 비추는 영화는 톱 영화였다고 한다.

첩보를 입수한 삼남극장은 곧바로 맞불을 놨다. 영화인 탁광선생(1923-1999)은 자신의 저서 '전북영화이면사'에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씨와 이씨의 신경전 덕으로 우리 전주에는 서울, 대구, 부산에만 있는 70㎜ 기계가 두 장소에나 있는 자랑을 하게 됐다. 코리아극장으로 기계가 도착하면서 일본인 기술자 두 명이 설치작업을 하기 위해 두달 가까이 체류했다. 필자가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중략)…일본 내에서도 인구 25만의 소도시에는 70㎜를 설치한 극장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전주 문화 수준을 높이 칭찬한다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뭔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70㎜ 영사기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감이 오지 않아 소싯적 영사기를 돌렸던 정정부(79)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1960년대 시네마오스카(옛 백도극장)에서 영사기사로 일했던 그는 침을 튀겨가며 70㎜ 영화를 치켜세웠다.

"이직한 선배를 만나러 코리아극장에 갔다가 영사기도 보고 영화도 봤어요. 영화 '벤허' 속 그 유명한 전차경주 장면을 보는데…마치 전차가 객석으로 달려 나오는 것 같은 서스펜스(긴박감), 그런 필(느낌)이 느껴진다 이 말이죠."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김씨와 이씨의 투자가 과연 성공했을까. 70㎜ 영사기가 전주 극장가의 황금기를 불러온 건 맞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TV가 안방을 점령하면서 결국 극장판 전체가 천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됐고, 삼남은 1977년, 코리아는 1980년 각각 부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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