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29억 방산 장비가 고철로 '방치', 납품 공장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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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연, 납품업체 대리 해명…축소‧은폐 도마 위
"흑연화 설비 확인…조속히 가져갈 것"
"인력상 직물 하나하나 확인 어려워" 책임 회피
감사 제보 근거도 확인 안 해…또 놓친 골든 타임

국방 연구 과제 당시 흑연화 처리를 담당했던 치구. 먼지가 수북하고 상단엔 녹이 슬어있다. 독자 제공국방 연구 과제 당시 흑연화 처리를 담당했던 치구. 먼지가 수북하고 상단엔 녹이 슬어있다. 독자 제공"사실이더라도 우린 사기당한 것."

지난달 12일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방산 비리' 논란의 진원지로 지목된 전북 전주시 팔복동 소재 D 납품 업체 옛 공장을 찾았다.

이곳은 D 납품 업체가 국방과학연구소(국과연)으로부터 의뢰받은 '리오셀 탄소섬유 및 직물용 연속식 치구(흑연화 열처리 설비) 설계'와 '리오셀 탄소섬유 직물 개발' 연구 용역을 수행하던 곳이다.

해당 공장에는 '방산 비리'를 폭로한 D 납품 업체 전(前) 직원을 포함해 국방과학연구소 담당 팀원 5명, 협력 업체 ㈜한화 담당자, 그리고 D 업체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국과연은 납품 업체를 대신해 해명에 나서는 등 취재진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가져갈게요"…2년 만에 사태 수습 나선 국과연

CBS노컷뉴스 취재팀은 '방산 비리' 의혹 관계자들과 함께 전주 공장에 들어섰다.

입구부터 과거 국방 미사일 발사체 직물을 뽑는 데 사용됐던 '치구'(직물 흑연화 처리를 돕는 기계)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치구는 앞서 국과연이 D 납품 업체에게 설계를 의뢰한 것으로, 국과연은 이 치구를 통해 만들어진 연구 직물도 함께 납품할 것을 주문했다.

연구는 지난 2021년 최종 종료됐음에도 해당 치구가 2년 넘게 방치됐던 셈이다.

앞서 이 치구가 위치한 전주 공장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D 업체는 임대 기간 등의 문제로 전북 김제시 소재의 한 공장으로 떠났다.

직접 해당 치구를 손으로 만지자 곧바로 손 마디가 검게 변했고, 직물이 나오는 입구엔 기름때도 묻어나는 등 수년간 방치된 흔적이 곳곳에 발견됐다.

국방과학연구소가 연구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직물은 이 치구를 통해 나왔는데도 이후 지속적으로 가동되지 않은 채 사진처럼 타 공장에 방치된 채 수 년간 수북한 먼지만 쌓여 있었던 것.

해당 연구의 관리를 책임했던 국과연 K 담당자는 "이 치구가 없는데 납품했다고 주장하는 직물을 다시 뽑을 수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뜸을 들였다. 이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지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D 업체는 해당 치구가 있는 공장을 임대해 4년간 사용해 왔다. 연구 당시 사용한 치구뿐만 아니라 안정화, 탄화 등 수많은 작업을 했던 설비가 모조리 전주 공장에 있었다.

사용된 설비가 모두 예전 전주 공장에 있는데, 연구 성공을 주장했던 직물을 다시 뽑을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치구를 살펴본 국과연 관계자들은 "연구 업체 내부 갈등 때문에 가져가지 못했다"며 "조속히 치구를 가져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들이 치구 및 연구 직물 일부를 확인하고 있다. 김대한 기자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들이 치구 및 연구 직물 일부를 확인하고 있다. 김대한 기자

국과연, 납품 업체 '두둔'…"조사 공정성 결여"

폭로에 나선 D 업체 과거 직원 A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30분간 국방 과제 연구 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기에는 자신에 대한 처벌을 감수한 발언도 포함돼 있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D 업체 대표의 지시로 '벨라루스산 가장 납품'과 '중국 기술 유출' 허위 보고를 직접 준비하고 목격했다. 최종 보고 시점까지 연구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A씨는 납품 업체 내부에 연구비 편법지급 등 불화가 있었으며 2년간의 고민 끝에 비리 의혹을 국과연 감사실에 제보했지만, 묵살당했다고 주장했다.

CBS노컷뉴스가 확인한 A씨의 엑셀파일에는 64페이지 분량의 내용과 제보의 근거들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지난 3월 국과연은 해당 내용에 대해 '문제없다'고 결론지었다.

A씨의 이야기를 청취한 국과연 담당자들은 김제 공장으로 이동해 D 업체 대표와 임원진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보고용 나무 상자는 75cm는 1m 폭인 납품 기준과 맞지 않아 55cm인 벨라루스산을 염두한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D업체 관계자에 앞서 국과연 담당자들이 앞다퉈 해명에 나섰다.

국과연 관계자는 납품 업체 관계자의 발언을 막고 "편의 문제다. 제품을 1m를 접어서 50cm로 하든 100cm로 하든 그게 문제가 있느냐"고 두둔했다. 그러자 D업체 현 관계자는 "박스 크기가 커지고 취급하는 데 힘이 들다"고 거들고 나섰다.

핵심이 될 수입산 허위 보고 등의 의혹에 대해 D업체 관계자는 "모른다"며 모르쇠로 일관했고, 이에 대해 국과연 관계자들은 추궁 대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방산 비리 의혹을 받는 납품 업체 공장에 모인 국과연 등 관계자들. 김대한 기자방산 비리 의혹을 받는 납품 업체 공장에 모인 국과연 등 관계자들. 김대한 기자 

"사실이더라도 사기당한 것" 책임 떠넘기기 '만연'

길고 긴 대화가 끝난 후 국과연 관계자들은 "사기를 당한 것이다"고 총평했다.

한 국과연 관계자는 "이런 말은 적절하진 않지만, D 납품 업체는 우리가 볼 땐 을의 을이다"며 "어떤 게(부정한 내용의 연구 결과가) 있었더라도 우리(국과연) 입장에선 사기를 당한 것이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CBS노컷뉴스 취재결과 국과연은 D 납품업체로부터 '월별 보고'를 받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월별 보고는 납품 업체 대표의 연구 진행 상황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뤘고, 국과연은 이를 청취했다.

국과연은 수입산 허위 보고 논란 당시 확인할 수 있었던 '골든타임'을 놓치고, 이후 감사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이날 현장에선 납품 업체의 단독 문제이며 비리 의혹이 사실이면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선을 그은 것.

현장 동행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골든타임'은 "감사에 제한이 있다" "서류만 확인한다" "인력상 직물 하나하나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국과연의 변명 속에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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